삼각관계
소설을 읽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서 머리를 좀 식히고 싶었다. 그래서 대중적이면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을 찾다가 퓰리처 상을 수상했다는 글귀를 보고 '순수의 시대'를 읽게 되었다. 권위 있는 상을 수상했으면 많이 읽혔을 것이고 그만큼 재밌을 거란 판단이었다. 이 판단은 옳았고 마지막 100페이지 정도는 정말 몰입감 있게 읽었다. 사실 중반부까지만 해도 여느 소설과 다를 게 없었다. 결혼을 앞둔 뉴랜드와 메이 사이에 메이의 사촌 올렌스카가 나타나 뉴랜드의 마음이 흔들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 세명의 인물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들과 주변인물들의 행동을 통해 서사를 풀어나가는 모습은 재밌기도 하지만 보편적인 재미여서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용이 전개될수록 인물들이 성장해 나가는 것이 눈에 보이고 작가가 이끌어내는 결말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는 과정은 소설의 백미인 듯하다.
누구나 하나씩은 포기한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뉴랜드는 아들의 입을 빌려 먼저 죽은 메이의 말을 전해 듣는다. '너희 아버지는 나를 위해 가장 원하는 것을 포기하셨다'라고.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듯이 뉴랜드는 올렌스카를 포기한다. 이 대목에서 많은 부분을 읽을 수 있겠지만 나는 '포기'라는 단어에 초점을 두고 싶다. 단지 인물들 간의 사랑관계에서 벗어나 도덕성, 인간의 욕망 때문이 아니라 단지 삶의 주체로서 다른 무언가를 위해 포기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 주목하고 싶었다. 포기가 나쁜 것은 아니나 포기라는 단어 속에 모종의 후회가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후회하지 않는다면 지금도 그때 한 행동이 옳다고 믿는다면 포기 보단 '선택'이라는 표현이 더 맞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뉴랜드는 마지막에 올렌스카를 만날 수 있음에도 만나지 않는 모습을 통해 포기가 아닌 선택을 했던 거라고 생각한다. 나도 지금 내가 뭐라고 쓰는지 모르겠지만 주저리주저리 써본다.
줄이며
제목은 순수의 시대지만 '순수'라는 단어가 무색하게 갖가지 권모술수가 펼쳐지는 뉴욕 사교계의 실태를 닮은 이 작품은 어느 관점으로 보나 수작이다. 순수의 시대라는 표현이 비판적인 내용이라고 생각해도 소설은 읽히고, 말 그대로 직역해서 감상하는데도 무리는 없다. 같은 내용을 읽더라도 무게를 어디에 두고 읽느냐에 따라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강하게 알려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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