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을 찾아서
근 2년간 행복을 찾아서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여러 가지 일을 했다. 지식이 늘지는 않았다. 무용하지만 아름다운 것들만 마음 한 구석에 켜켜이 쌓였다. 언젠가 이 이야기들이 나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렇게 잊어갈 때쯤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제목은 얼핏 질문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우리는 직감적으로 소유보단 존재가 이 책의 핵심 가치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존재일까?
존재적 양식
먼저 소유적 양식과 존재적 양식의 개념과 상세한 비교설명은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인류가 취하고 있는 보편적인 실존양식이 소유적 실존양식이다. 차를 사기 위해서 일하고 쇼핑을 하면서 행복감을 느끼고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내가 결정되는 것이다. 소유적 존재양식은 비단 물질뿐만이 아니라 사랑, 학습, 대화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학습의 경우 교수가 말하는 것을 고정적으로 받아들이고 필기, 암기하는 것이 지식을 소유하는 것이 라면 수업 중 다방면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배경지식과 상호작용하며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활동이 존재적 양식의 학습이라는 것이다. 이쯤 되면 느낌이 오는데 우리가 존재적 실존 양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 저자도 존재적 양식의 예시를 니코마스 윤리학, 스피노자, 석가모니를 든다. 솔직히 우리가 현자들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조금이라도 따라갈 수 있는가? 내 수준에서 표현하자면 존재적 실존 양식은 좋은 것들이다. 물질에 국한되지 않고 과거와 현재 미래와 상호 교류하면서 양보와 배려를 미덕으로 삶는 삶. 소유한 다는 것은 언제든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기에 강박을 느끼지 않고 성공을 추구하나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되지 않는 삶. 그게 바로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존재적 실존 양식의 삶이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책을 읽으면서 거부감이 들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이렇게만 살아가면 삶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나는 아직 먼 걸까?' 이런 생각이 들어서 아름답고 무용한 이야기들이 한편에 쌓이는 걸까? 책을 덮고 현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들은 어떤 고민이 있을까? 신의 뜻대로 평생을 살면서 그들이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있을까? 천천히 생각해 보다가 종교전쟁, 빤스 목사, 풀소유 스님, 끔찍한 지하드 등이 떠오르자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줄이며
얄팍한 내 수준에서는 존재적 양식의 삶이 어렵게 느껴진다. 언젠가 존재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생각해 봤지만 존재적 삶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오해하지 않으면 좋겠는 게 책 속에는 좋은 말들과 실천 양식이 제시되어 있다. 다만 내가 받아들이기 힘들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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