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 이야기/책 이야기

중국 딜레마 : 박민희

by 독서하는 나그네 2022. 9. 16.
반응형

중국 딜레마

옆 나라 중국

나에게 있어서 중국은 특이한 나라다. 애증의 관계랄까? 동아시아에 위치해 역사를 같이하면서 크고 작은 전쟁을 치른 옆 나라. 원나라의 말발굽에 나라가 짓밟혔을 때는 너무 미웠고 일본을 상대로 독립전쟁을 펼칠 땐 든든한 존재였다. 세계 역사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을 자랑스럽게 여길 때 명나라 정화의 대 함대가 있었다는 사실도 놀랍다. 이렇듯 어떤 관점에서 중국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나에게 중국이라는 나라의 의미는 달라졌다. 그리고 2019년 겨울 한 대학교 강의실에서 한국인 중국인 몽골인이 만났다.

 

하나의 중국

정치외교학과 수업이었는데 정확한 과목명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확실한 것은 아시아계 외국인 학생들이 많았다. 그 수업에서 중국인들이 자신의 나라를 상당히 사랑하고 자부심 느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다가 칭기즈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한국인인 내 생각을 먼저 말하자면 칭기즈칸은 세계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진 제국을 건설한 인물이며 이는 곧 원나라가 되었다는 사실과 고려의 내정에 깊이 관여했다는 점 정도다. 자연스럽게 송나라 다음 원나라로 생각했고 중국의 역사라는 인식이 있었다. 하지만 몽골인의 생각은 달랐다. 칭기즈칸 사망 후 여러 개로 나뉜 몽골제 국중 하나인 원나라를 몽골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말했다. 물론 그 학생들의 입장이 각국의 대표 입장은 아니기 때문에 단정 지을 수 없지만 어렴풋 자국의 역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중국이 한족으로만 구성된 국가였다면 타민족이 세운 왕조인 원나라, 청나라를 자국의 역사로 이해했을까? 중국이라는 구심점으로 많은 이들의 역사를 왜곡하고 자치의 목소리를 억압하는 것은 아닐까? '무엇이 모여 하나가 되었을까?'라는 궁금증이 남았다. 생각해 볼 문제다.

 

취안 타이이

기술이 발전하고 사회제도가 성숙해진 것은 수많은 진통의 결과물이다. 영국의 소년 공에서 노동법이 보장해 주는 근로자가 될 때까지 수많은 노력들이 존재했다. '취안타이이'는 중국에서 꽤 유명하다. '취안타이이'는 전태일 열사의 중국식 발음이다. 약 50년 전 우리나라의 노동실태를 고발하고 노동자의 권리 향상을 위해  본인을 희생했다. 이와 비슷한 일이 중국에서 벌어졌다. 2021년 중국의 한 배달 노동자가 임금체불 문제로 분신을 선택한 것이다. 중국은 개혁개방 제도를 선택하면서 세계의 공장이 되었다. 세계의 공장은 많은 상품을 생산해 내며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하지만 중국의 사회제도 특성상 부의 편중이 이뤄질 수밖에 없었고 노동자들은 점점 병들어갔다. 언제 또다시 '취안타이이'가 탄생할지 모르는 일이다.

 

1989가 2019에게

1989년 중국 천안문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다. 이들은 정치개혁, 시장 개혁, 빈부격차, 특권층의 부패를 이야기했지만 묵살되었다. 그리고 30년 뒤 홍콩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홍콩은 조금 특별한 상황이었는데 1997년 영국으로부터 반환되었기 때문에 서구의 색이 강하다. 시위의 발단은 '범죄인 인도 법안'에서 시작되었는데 쉽게 말해서 홍콩에서 잡힌 사람을 중국으로 데려가 처벌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홍콩은 비교적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었기 때문에 개혁, 진보 언론인 및 정치인들이 활동하던 곳이었다. 시민들은 거리로 나왔다. 경찰은 최루탄을 쐈고 시민들은 우산을 썼다. 나아가 홍콩의 정치권도 장악했다. '홍콩은 홍콩인이 통치한다'라는 슬로건이 무색하게 일국양제는 무너졌다. 중국 본토에서 인정한 후보자만 선거에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시민들은 끊임없이 거리로 나왔지만 홍콩 근처 대규모 군사훈련을 하고 시위대를 '서구 세력과 결탁한 매국노 집단'이라며 매국노라는 프레임을 씌우며 제압했다. 아무리 눈을 가려버린들 마음까진 가릴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생각

중국은 미국과 패권을 경쟁하는 대국인 것은 저명한 사실이다. 풍부한 자원, 넓은 영토, 많은 인구 등을 살펴봤을 때 절대 뒤처지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중국의 정량적인 부분만을 평가하지 않는다. 중국에서 사라지는 사람들에 집중하고 중국에서 늘어놓는 거짓 해명에 집중한다. '공산당의 권위적인 통치에 인민이 순종하는 체제가 중국의 번영에 적합하다'라는 주장을 끊임없이 펼치고 있다. 한 줄의 주장 속에서도 나는 이해가 안 가는 것이 너무 많다. 하고 싶은 말도 너무 많다. 동시에 현실을 안다. 우리는 중국을 놓을 수 없다는 것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내가 알던 정의는 무너졌다. 현실은 정의보다 더 무서운 것인가 보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