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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이야기/책 이야기

새로운 가난이 온다 : 김만권

by 독서하는 나그네 2022.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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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가난이 온다

새로운 가난

가난하다.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무엇이 모자라다. 집이 가난할 수도 있고 마음이 가난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기 전에는 새로운 분야에 가난함인가? 하고 집었던 기억이 난다. 책에서 말하는 새로운 가난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고 있는 자본의 가난, 즉 빈곤이었다. 그렇다면 왜 새로운 가난이라고 말했을까? 기술이 발전하고 더 풍요로운 지금 우리는 왜 가난할까?

 

기술의 발전

기술의 발전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대답하기 전에 생각해 보자. 필자는 전철을 타고 친구를 만나러 가고 마음만 먹으면 공기 좋고 물 좋은 해외로 여행을 갈 수도 있다. 또한 굳이 환전을 하지 않아도 비자카드 하나면 전 세계에서 결재할 수 도 있다. 굳이 편지를 쓰지 않아도 손가락 몇 번 움직이면 메시지를 보내는 세상이다. 이래도 기술의 발전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물론 있다. 기술이 발전해서 더 이상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 것들을 다루는 사람들이다. 말을 관리하던 사람들, 편지를 취급하던 사람들, 환전으로 수수료를 받던 사람들 등등. 사회적으로 봤을 때 기술의 발전이 당연하고 필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피해를 받는 사람들도 생긴다. 그 이유는 기술의 발전이 '부'와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기술의 발전은 곧 생산성의 향상이나 시간의 단축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서 제임스 와트가 개량한 증기기관은 생산력을 극대화했으며 산업혁명의 시작을 알렸고 반도체 기술의 발전은 컴퓨터의 연산 능력을 증가시켜 좀 더 복잡하고 다양한 작업을 가능하게 했다. 그렇다면 기술은 왜 '부'와 관련이 있을까? 이유를 알아보기 전에 고전적으로 '부'를 창출하는 방법에 대해 알아보자. '부'를 창출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바로 자본소득과 노동소득이다. 자본소득은 땅, 임야, 공장, 천연자원 등 생산수단이나 자원을 이용하여 '부'를 창출하는 것이고 노동소득은 노동의 대가로 임금을 지불 받는 것을 말한다. 기술은 자본소득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술은 생산력을 높여준다. 그렇게 노동자를 돕는다. 생산력 높은 노동자의 노동은 자본가의 높은 소득을 말한다. 예를 들어보면 기존의 망치보다 훨씬 튼튼한 망치가 개발되었다. 노동자는 새로운 망치로 더 많은 더 좋은 제품을 생산한다. 공장장은 더 많은 제품을 판매해서 부를 쌓는다. 선순환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랬었다.

 

거부할 수 없는 기술

노동자의 생산성을 높여주던 기술이 노동자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망치를 든 노동자보다 기계가 더 효율적인 것이다. 술 먹고 출근하지 않을 일도 없고 상사와 말싸움할 일도 없다. 그렇게 노동자들은 자리를 잃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조직적으로 행동하여 그들의 권리를 주장했고 결국 노동 3권과 같은 사회적 합의를 이뤄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을 완전히 막을 순 없었다. 전화 교환원, 버스 안내원, 마차 꾼 등등 많은 직업이 사라졌다. 이런 흐름은 종업원 대신 로봇이 서빙을 하고 키오스크로 주문하는 우리의 모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기술의 발전은 새로운 노동의 형태를 출현시키며 기존의 노동을 지켜주던 울타리도 허물고 있다. 공유경제의 대표주자인 우버가 그 중심에 있다. 우버 기사들을 직접 고용하지 않지만 노동자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때문에 기업은 고용주로서의 책임과 비용을 지불하지 않지만 우버 기사들은 별점 제도와 같은 다양한 장치들에 의해 노동자처럼 종속되어 일한다.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또 하나의 변화는 세계화다. 세계화는 민족으로 이루어진 국가의 개념을 넘어서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종교 등 다양한 가치관을 공유하고 상호 협력을 지향한다. 우리는 구글로 검색하며 맥도널드를 먹고 아프리카의 다양한 동식물을 촬영한 다큐멘터리를 시청한다. 반대로 지구 반대편에서는 한국 음식, 음악, 드라마 등을 소비한다. 우리는 분명 더 좋은 세상에 살고 있다. 생산력도 높고 편리한 세상. 기술의 발전으로 풍요를 이룬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풍요가 흐르는 방향은 한곳을 향하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철수는 핸드폰이 있고 영희는 없다. 현대 사회에서 누가 더 유리할까? 조금만 생각해도 알 수 있다. 이런 기술의 격차가 개인과 개인 사이에도 존재한다. 그러면 지역과 지역, 국가와 국가 사이에 발생한다면? 기술이 가져오는 편리함이 기득권으로 변해 버린다면? 기술의 발전으로 사양되는 산업에 종사한다면? 이를 국가가 보장해 줘야 하는가? 보장해야 한다면 어떻게? 누구에게? 얼마나? 혹은 아예 신경 쓰지 않는다면?

 

줄이며

기술의 발전은 필연적이다.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이윤을 극대화하는 기업을 비난할 생각도 없다. 무엇이든지 순기능이 있으면 역기능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보장, 보상을 요구하는 포퓰리즘 정치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경제를 배우며 비교우위와 절대 우위에 대해 배울 때 정말 '경제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두 나라가 각각 우위에 있는 산업을 발전시켜 서로 교환하면 투입된 노동 대비 높은 생산량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내가 쌀, 옷 둘 다 만들 필요 없이 하나씩만 만들어서 바꾸면 된다는 얘기다. 하지만 세상은 경제만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나는 옷만 만드는데 갑자기 상대방이 나에게 쌀을 주지 않는다면? 문제가 발생한다. 비슷한 맥락으로 기술의 발전이 모든 것을 풍요롭게 하진 않는다. 사회가 존재하는 이유, 우리가 다 같이 사는 이유를 잘 생각해 보면 우리가 직면한 새로운 가난을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른다. 기술이 발전하는 만큼 사회제도도 발전해야 하지 않을까? 또한 책에서는 기술의 발전을 노동의 관점에서 고찰했지만 환경, 윤리 등 다양한 측면에서도 고찰할 필요성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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